자유로 가는 길목에서(20150715)

답은 간단하다. 복잡하게 생각하면 더 복잡하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말아야한다.

반복적인 학습에 의해서 조정된다. 내 마음대로. 뇌는.

잘못 설계된 인체구조를 바꿔라.

인체의 설계가 태어나면서 자라오는 과정에서 의식으로 인해 잘못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세포기능, 조직, 구조 등 인체의 잘못된 설계로 인한 구조를 바꾸려면

인간의 생명유지시스템의 설계를 바로 잡아야 한다. 그러려면 전체구조를 다 알아야 가능하다.

설계변경, 시스템 신경조직의 설계변경 그래야 본성을 찾는다.

그렇다면 전륜성왕같이 본신을 유지한 사람은 잘못된 설계로 부처가 되지 못한 것인가요?

그렇다고 볼수 있다.

잘못된 설계를 가지고 있지만 그 처음의 본신을 유지한 것일 뿐, 수행을 하여 설계를 변경해야만 부처가 될 수 있는 것을 잘못된 설계를 변경하지 않은 채, 원형을 유지하고 살아간다고 봐야 하겠지.

그러나 사람들이 이해할까?

 

부신이 왜 신장에 붙어 있을까? 왜 다른 장기가 아닌 신장에 붙어있을까?

수행이 체득이 없으면 답을 못 찾는다.

신경을 받아들이는 전 작동의 시스템을 알아 수정을 해야 한다.

인체가 병이 드는 이유가 잘못된 시스템 때문인데,

부신의 역할을 보면 일단은 신장은 피를 걸러주는 역할을 하고 신장이 양 옆에 두 개가 붙어있는데 갈비뼈가 끝나는 부위에 자리하는데 신장이 피를 걸러주는 일을 들여다 보면 신장이 해야 하는 일이 굉장히 많다.

신장이 하루에 각 100리터의 피를 양쪽 합하여 200리터를 걸러낸다고 가정하면 신장이 경직으로 압박을 당한다면 이 피를 다 걸러내지를 못하니 피를 적게 들어와야 한다고 뇌는 판단한다.

그래서 피가 적게 오려면 혈관을 축소시켜야 한다는 단순한 결론을 내리고 반응한다.

그러면 부신에서는 혈관을 축소시키는 경직호르몬 코티졸을 부신에서 만들어 혈관을 축소시키는 것이다.

그러니 부신에서 혈관을 축소시켜 혈액의 양을 줄이기보다 신장이 기능을 잘하도록 하는 것이 먼저다.

그렇지만 인체는 몸이 굳게 되어 인체의 주인이 병드는 것이나 혈액을 다 정화 못해서 탁한 피에 의해 병드는 것이나 혈액의 양을 줄여서 병드는 것이나 뭐가 다른가?

그러니 신장이라도 살아야겠다고 판단을 해서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이것의 예를 보면 인체의 잘못된 시스템을 엿볼 수 있겠지?

인체는 의식에 의해 설계를 변경해 간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마치 태아가 뱃속에서는 소변을 보지 않아도 되다가 태어나면서 어느 정도 까지는 소변을 가리지 않고 몸이 알아서 지 맘대로 소변을 보다가. 그러니 기저귀를 차잖아. 그러다가 연습을 통해 소변을 가리게 되는 그 의식에 의해 잘못 만들어지는 인체의 시스템.

이런 인체 기능들이 많지, 이것을 변경해야 한다는 것이다.

 

쉽게 들어내지 말고 익혀라. 앞서간 사람들은 자네들이 드러내는 순간, 놓치지 않고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아라. 그러니 그런 상을 드러내지 마라. 그저 몸의 변화를 솔직하게 표현해야지 표현하는 방법만 보아도 상이 보이기 때문에 다만 자유롭게 변화를 표현하라는 뜻이다.

당연히 수행하는 과정에서 가다가 말기도하고 부딪치다 넘어지기도 하고 신비한 체험도 하고 또 고비도 있는데, 그런 것은 자신만의 현상이 아니기 때문에 마치 특별한 경험인냥 자신만의 것인냥 상을 내지 말라는 것이다. 선도반들은 다 겪고 넘어간다.

사람마다 경직도와 신경부위의 차단정도에 따라, 솔방울 샘의 활성화에 따라, 성선의 차단 정도에 따라, 대뇌의 활성화에 따라, 호르몬에 분비에 따라, 각각 다르다.

그것은 물리적인 변화에 따라 나타나는 마음의 작용(=시냅스=의식의 신호)인데 수행과정 중 변화되는 마음의 작용으로 인한 상을 드러내지 말고 자신을 고요히 가라앉혀 자신을 드러내거나, 자신을 인정 받으려거나 하지 말라는 것이다. 훗날 이런 상을 누른다는 것이 힘들긴 하여도 스스로를 회광반조하여 일어나는 상을 누르는 이런 반복학습을 통해 자신을 제어하는 힘과 내면의 힘을 키울수 있다.

이런 하심의 방편이 자신의 상을 누르도록 가능해지면 자신을 다스리는 힘이 차츰 생기게 된다. 그래야 의식이 사라진다. 그래야 몸이 이완된다. 이와 같은 연습을 통해 자유로워 지는 것이다. 그러니 드러내지 마라. 또한 내 제자가 그런 상을 드러내어, 자신의 그릇됨이나 수행정도를 드러내면 어찌되겠는가? 나는 그것을 그냥 지켜만 보지 않는다. 그저 모습으로 나타내어라. 스스로 알아차릴 수 있게 증명해주면 된다.

그저 법에 대한 환희심을 있는 그대로 드러내면 된다. 꾸미고 포장하고 언어와 문자를 통해 다른 희생자가 생기는 것을 철저하게 차단하라.
배꼽만 보아도 배꼽 아래로 죽은 사람과 배꼽위로 죽은 사람이 있다. 배꼽아래가 살아있는 그런 경우, 이런 경우는 일반인하고 수행느낌이 다르다. 배꼽이 열리게 되면 이런 경우에는 그 느낌이 폭발적이다. 이럴 때 뇌에서는 끝없이 호르몬을,

환경을 요구한다. 그러니 환경이 맞아 떨어지면 몸이 축 늘어지며 생각이 사라진다.

이 때 온몸에 땀이 비 오듯이 쏟아지고 대뇌에서는 모르핀 호르몬이 분비되며 생각이 사라진 황홀한 순간이 찾아온다. 그러나 과한 것은 모자람만 못하다. 강한 몰입으로 다시 경직된다.

체득을 통해 몸이 부하가 걸림을 알고 밀면 부하가 생김을 알게 되어 안 몰아가게 되는 방법을 터득하게 되고 그것이 수행이다. 의식을 넣어 몰입을 하는 것도 수행, 이 의식을 놓아주는 것도 수행, 이런 것을 인체를 통해 전반적으로 느끼면서 가는 것이 깨달음으로 가는 과정이고 수행과정이다.
앞선 선도반에게 묻고 인체를 보고 적절한 조화를 이루는 것이 훨씬 현명하다. 좀 된다고 몰아붙이면 부하가 걸린다. 내면에서 일어나는 몸과 마음의 변화를 포착하라. 이러한 수행법이 익지 않고 드러내면 상으로 표출되고 상대들은 훤히 본다는 것을 알아라.
안으로 내면으로 눌러라. 상대들이 얼굴 좋아지네 하면 네 고맙습니다. 그러면 된다. 상대들이 좀 알아본다고 경망스럽게 행동하지 마라. 조금 몸에서 벌어진다고 다 드러내면 하심이 안 된다. 좀 비운다고 고생 고생했는데 단계마다 이러한 경우가 반복되는데, 자신의 내면과의 싸움이고 의식과의 싸움이고 이것을 통해 몸과 마음의 이완을 향해 비워가는 것이 수행인데, 매번 이런 경계에서 자신을 제어 할 기회를 삼아 정진하라. 이것이 알찬 모습이다. 이래야 보는 이들도 포근하고 편안하게 안기는 것이다.
수행을 하다가 몸이 이완이 대어 통이 커지면 인체는 몸통을 키우려고 들숨이 마냥 들어오는 경우가 있어서 이때 강하게 몸을 펴준다고 들숨을 밀고 있으면, 거품 피가 온몸을 돌고 심장에서 폐로 들어가 폐가 이완으로 넓어졌을 때 기체교환이 이루어지지 않고 들숨을 밀고 있으므로 다시 심장을 거쳐 온몸으로 순환 되는데 (70평방미터나 되는 폐포를 거치며) 이때 기화현상에 의해 액체에 녹아있던 이산화탄소나 질소들이 기화되려고 하는데 이때 거품피가 되어 심장을 통해 온몸을 순환할 때 관절 부위에 오면 다시 거품 피가 일어나면서 다음 혈액을 막고 있기 때문에 활성산소에 의해 염증이 발생된다. 이것이 반복되면 부하가 차서는 수행이 퇴보되는데 스승마저 없고 수행물질이 염증이나 이완호르몬을 대체해 주지도 못하기 때문에 수행이 실패되거나 수행자들이 요절하는 원인이 된다.
관절의 염증도 활성산소에 의해서인지 염증에 의해서인지 신경을 건드려서 그런 것인지 여러 원인이 있다. 그래서 선도반 중에 수행해 올라오다가 이유 없이 팔에 깁스를 하거나 한다. 몸통이 안에서 벌어지면 팔의 신경이 강하게 건드려지며 통증이 온다.
인대가 경직되다 놓아지는 순간 건드려지면 강하게 고통을 준다. 신경이 건드려 지는데 이것은 팔이나 다리나 다르지 않다. 도의 척도를 보는 한 가지가 목젖이다. 기도가 목안에 파 묻혀 있는 사람 “도” 없다. 그것은 기도와 식도가 경추와 그곳 인대 근육 등등하고 다 떨어져 공간을 확보해야 하는데 이때 몸의 근육은 놓아주며 기도와 식도가 커지고 반대의 경우는 경직으로 알약하나 삼키지를 못하는 것이다.

경직이 심한 사람일수록 반응이 격하게 온다는 것을 알아라. 수행력이 아니라 그 만큼 성질이 못되고 의식이 강하단 것이다. 가릉빈가 역시 온몸이 벌어지고 목주변의 근육들이 모두 놓아주면 식도가 커지고 울림이 흉부부터 떨리며 울리니 그 음성이 듣는 이로 하여 편안함을 느끼게 해준다.